사람이 살의를 품는데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늘 부대끼며 올라타던 출근길 열차에서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는 옆자리 사람에게 품을 수도 있고,
늘상 하던 게임에서 나를 이기고 위 아래로 엉덩이를 현란하게 흔들며 티배깅을 하는 상대방에게 품을 수도 있고,
늘 하루의 마지막에 보던 웹소설의 지리멸렬한 전개에서도 품을 수 있다.
내가 읽던 웹소설은 웹소설이었다.
이 인터넷의 바다에서 매일같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이세계전생후회집착피폐하렘안락삶’을 특징으로 내세운 웹소설 중 하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 많고많은 웹소설 중 그걸 읽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세계전생후회집착피폐하렘보추퍼리TS백합’을 특징으로 내세운 웹소설은 그거 밖에 없어서였다.
화두로 꺼낸 김에 논하건데, 이게 참 문제다.
대체 왜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작가들 중 보추 히로인이나 퍼리 히로인, 하다못해 TS 히로인을 내세우는 작가가 없는걸까?
작가라 한다면 무릇 창의성과 독창성은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하는거 아닌가?
이런 기초적인 성적페티쉬 조차도 섭렵하지 못하는 이들이 작가라고 나서는게 작금의 현실이요, 현실의 비탄이었다.
그토록 애탄스러운 이 시대에 그 작품은 황무지를 떠도는 나그네 같던 나에게 오아시스나 다름 없었다.
그 소설을 봤을 때 밤잠을 꼬박 새며 읽었던 환희와 기쁨이란!
구태여 비견하자면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발견하고 몰래 컴퓨터를 키던 때와 같았지.
그렇게 매일 밤마다 작가님의 신작을 보고, 나와 같이 기본적인 성적 취향을 섭렵한 깨우친 이들과 댓글창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나날은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품을 읽던 중 돌연 가시 하나가 내 목울대 안쪽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듯한 불편함이 느껴지기 전까진 말이다.
무릇 백옥에도 티가 있기 마련이라는듯 이 뛰어난 작가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희생 서사에 집착한다는 거다.
물론 이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나 히로인이 조연의 희생으로 각성하는 거는, 우주원숭이가 우주PMC를 운영하는 사장이 대머리를 불꽃놀이 삼아 터뜨리는 걸 보고 각성하는 것 처럼 맛 좋은 클리셰니까.
심지어 그 대상이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을 키워왔으며, 그녀가 용사로서의 신념을 세우도록 도운 스승님이라면 안 죽는게 직무유기일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 번은 심했어.
주인공이 스승님이 죽었다는 사실에 각성하고,
모두의 힘을 모아 부활한 스승님이 또 죽었다는 사실에 깨달음을 얻고,
영혼으로 돌아온 스승님이 소멸했다는 사실에 초월했다는 서사는 심했어.
심지어 중간중간마다 히로인들 대신 죽어났던 거 까지 포함하면 몇 번인지 기억도 안나.
내가 아무리 아무거나 집어먹는 누렁이라 해도, 몇 달 동안 똑같은 개밥만 주면 그 때는 들개가 되는거야.
가끔은 시저도 좀 섞어다줘야하지 않겠니?
그런 심정을 담아서 나는 댓글에 이제는 스승님이 아니라 누더기 골렘이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로 포장한 채 은근히 항의해보았다.
작가님께서는 그걸 흡족하게 보시고 스승님의 종족명을 누더기 골렘으로 변경시켰다.
“……….”
서두에서 적었듯, 그것을 보며 나는 살의를 느꼈다.
아니, 이건 살의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린다면 그것은 자식을 미워해서 때리는 걸까?
아니다, 그건 자식의 행동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자식이 보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는 것이다.
그런즉 내가 늦은 밤에 컴퓨터를 킨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댓글창을 열고 거기에 895,000 자에 달하는 비평문을 작성하는 것도 잘못된 게 아니다.
그저 이 작가님께서 보다 나은 작가님이 되셔서 월천킥을 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쓴 거였다.
다음날 공지글이 올라왔다.
[연중공지] 일신 상 문제가 생겨서 연재를 이어나가기 어려울듯 합니다.
어 씨,
이게 아닌데.
작가야! 작가야!!
너가 이렇게 죽으면 안되는 거잖아!!
고작 이정도로 두들겨 맞았다고 죽으면 안되는거잖아!!
아직 너가 꽃피워낼 작품이 많은데 무엇이 급하다고 이리 빨리 가는거니!
내 작가야, 나만의 작가야!!
“아니 내 보추퍼리TS백합물이!!!”
당연히 댓글창도 그것을 보고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허허롭게 웃으면서 TS는 이성애인지 동성애인지에 대해 논하던 신사들이 옷을 찢어발기고 나에게 들개마냥 거품물며 이빨을 드러냈다.
- 돌아와 작바오ㅠㅠㅠㅠㅠ
- 야이 새꺄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하랬잖아!!
-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너가 죽였어
- 작가야, 내가 한 번만 더 잘할게. 돈 부족하면 말만 해줘. 얼마든지 줄게. 가지마 제발! 저 새끼 말만 듣고 가지말라고!!
- 이 또라이 자식아 빨리 작가님께 사과드려!!
“…그래, 내가 좀 심하긴 했지.”
생각해보면 이제 막 뿌리를 내린 파릇파릇한 작가님께 비료를 포대기로 들이부은 거 같았다.
내가 한 행동이 과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 미
그 때에 댓글창에 작가님의 댓글이 올라왔다.
- 그런데 주인공 스승의 종족을 누더기 골렘으로 변경한 건 좋지 않았나요?ㅠㅠ
- 미친놈아니가잘못한거잖아대체어떤작가가주인공스승캐릭터를누더기골렘으로만드는데니가아서스라도되는거야이정신나간시체성애자야애초에내가그걸진담으로한소리인줄알아좀적당히하라고돌려서말한건데그걸그렇게못알아들으면사회생활이라도한건지의심이라도될정도인데너친구는있는거냐없다면없는이유를알겠다이사이코패(더보기)
그리고 댓글창이 터졌다.
자,
이것이 내 전생에 있던 일이었다.
왜 전생이라고 말하냐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던 내가 신호위반과 과속을 겸한 대형트럭에 치이고,
눈을 떠보니 갓난아기로 전생해 있고,
그 갓난아기가 커보니 주인공의 스승이 되어 있는 것.
여기까지가, 어쩌면 내가 작가님에게 비평문을 적음으로 생긴 필연이 아닐까 싶었다.
때문에 종종 과거를 회상할 때면 억울한 심정이 붓물 터지듯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왔다.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수없이 죽고 죽어서 장차 종족명이 누더기 골렘으로 개변될 인물로 전생하게 된 걸까.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신이라는 게 있었다면 나의 귀티나고 명경지수와도 같은 심성에 눈물을 흘리며 천국으로 이끌어주셨을텐데,
하다못해 먼치킨 능력 한 두 가지 정도는 내어줬을텐데.
이 몸으로 살아온지 어연 32 살이 되었음에도 아무것도 없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 신이랍시고 알려져있는 이들은 신이 아니라 사짜인듯 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라고 했던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애써오면서 갖은 기술을 섭렵해온 나는 모험가 길드 내에서 콧방귀 좀 뀔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인맥들도 두루 갖추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에 빌붙어서 살 수 있게 판을 짜뒀으니,
작가님, 아니 작가놈의 음흉한 손길이 나에게 닿을리 없었다.
만약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음, 그래.”
주인공, 에나버니.
나를 수없이 죽고 죽는 무간지옥으로 떨어트릴 무시무시한 숙적.
때문에 나는 적대감을 담아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나를 마주보는 그녀에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온몸이 드래곤과 오우거의 피로 점칠이 된 채 그렇게 나를 바라보진 말아다오.
“금방 저녁 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
“되었다. 내가 하마.”
“하지만 스승님…”
“악룡을 사냥하고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이 정도는 내가 해야되지 않겠냐.”
“괜찮습니다 스승님, 그저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간단한 일.”
평범한 드래곤도 토벌하려면 왕국의 기사단이 필요할 정도다.
그런 드래곤 중에서도 천 년 이상 산 고룡의 둥지에 쳐들어서가서 단신으로 무너트리고 왔는데 간단한 일이라고.
“…고룡을 사냥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마리를 사냥하는데에도 왕국이 아닌 제국이 나서야 할 일이거늘―”
“두 마리였습니다.”
“…두 마리?”
“예, 말씀하신 고룡을 사냥하고 나오는 길에 어느 드래곤이 저를 덮쳤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온 것도 그것도 사냥하고 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사냥한 드래곤은 어떻게 생겼지?”
“……….”
“에나?”
“아, 죄송합니다 스승님, 어찌 생겼나 잠시 떠올리느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생사가 불분명한 싸움 속에서 격전을 치룬 상대를 회고하는게 아니라, 길가다가 문득 본 벌레의 생김새를 떠올려보려는 거 같았다.
“한쪽 뿔이 부러져있었고, 온몸에 번개 무늬와 같은 자국이 새겨진 검붉은 비늘을 한 드래곤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그 드래곤이 다른 악룡 중 하나인 게스트리아 라는 걸 알아챘다.
‘마왕군은 초상집이나 다름 없겠군.’
반나절 사이에 동맹을 맡은 악룡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도살 당했으니, 마왕군 간부진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치닫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에나버니.”
“네, 스승님.”
“슬슬 때가 되었구나.”
“…그 말씀은…”
“용사로서의 책무를 이행할 때다.”
마왕이 이 세상에 나타나 암담하고 파멸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그를 막기 위한 용사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퀘퀘묵은 클래식 서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당연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이나 히로인을 돋보이기 위한 희생용 조연에 불과하니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나또한 생각에 잠겨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떠올렸다.
이 세계의 기반이 되는 소설, 그러니까 본래 사건의 흐름 대로라면 용사는 자신의 파티원들과 함께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로 마왕군을 토벌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마왕군은 용사를 막기 위한 인질로 스승인 나를 붙잡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하고,
뒤늦게 소식을 듣게 된 용사가 찾아왔지만 이미 나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 스승을 품에 안아든 용사는 분노와 절망을 토해내며 오열하고, 스승님은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독여주는 건 명장면이긴 하지만…
그 죽어야 하는 스승님이 나네.
절대 안할거다.
‘FPS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직접 전쟁터로 뛰어들기 좋아하는 미친 놈이 어디있어.’
인생은 멀리서 볼 수록 희극이고, 감동적인 서사는 더더욱 멀리 볼 수록 희극이다.
옛 선현의 격언을 받든 난 이미 떠날 준비를 애진작에 끝마쳤고, 정착 자금도 마련해두었다.
마왕군의 별동대인지 뭔지가 여기에 쳐들어 올 때 쯤이면 나는 쭉쭉빵빵한 미녀들을 양 옆에 낀 채 해변가에 누워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거다.
“…승님, 스승님?”
“…음, 왜 그러지.”
아차, 나도 모르게 멍 때렸나보다.
나는 태연스럽게 턱을 괴고 있던 팔로 팔짱을 끼고서 에나버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용사가 되길 바라십니까.”
“……?”
뭐지.
원작에서 얘가 이런 대사를 했던 적이 있었나.
물론 내가 본 소설에서 그녀와 스승의 대화는 얼마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 자신이 용사가 되는 걸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어째서, 지금 나는 그녀가 뭔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거 같다고 생각되는걸까.
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
가 다시 시선을 슬쩍 피했다.
저게 사람 눈깔이야 동태 눈깔이야.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무슨 도살자가 따로 없어 보였다.
아무튼 용사라.
“내 의견을 묻기 보다는, 네 스스로 판단하는게 더 옳을테다. 용사란 다른 이가 시켜서 하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니.”
“그렇습니까.”
“하지만 네가 용사가 되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온 것도 사실이지.”
“……….”
“두려운게냐.”
“…예.”
“그렇다면 말해주마.”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너는 용사가 될 수 있다. 네 스승인 내가 장담하마.”
그러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용사가 되서 마왕을 토벌해야지 이 세상이 내가 오래오래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만큼 평화로워지니까 꼭 해야지.’
내가 이 사망플래그를 지금까지 곁에 두고 키워온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온 세상이 개판이라면 그 돈은 휴짓조각 밖에 안된니까.
그러니 힘 좀 써다오 내 우량주야.
네가 높이 날아오르면 날아오를 수록 내 삶도 더욱 안락해지니 말이다.
그래도 너무 가까이 있진 말고.
원래 주식이든 코인이든 올라갈 때 손절해야 익절이잖니.
“스승님.”
“그래, 내가 너를 믿고 있으니―”
그러던 때 돌연, 그녀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거기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떼어내려던 나는 그녀의 우왁스러운 손길에 그대로 붙들렸다.
천천히, 그녀는 내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댔다.
“스승님.”
“…듣고있다.”
“스승님.”
“……….”
계속된 부름에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드래곤 특유의 푸른 피가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마냥 동태눈 같았던 그녀의 두 눈에는 오묘한 이채가 어려있었다.
그리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제가 용사가 된다면, 그것은 스승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렵다.
평소에도 그녀를 볼 때마다 두려워했던 나였다.
내 사망플래그 이기도 했고, 동태눈에 늘상 피칠갑을 하고 다니는 그녀였기에 당연한 공포심이었다.
마치 길가다가 집채만한 호랑이와 마주치면 ‘아 죽었다.’ 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만약 스승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신다면…”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공포심은 달랐다.
“저는 더이상 용사가 아닐 겁니다.”
질척이고, 음습하고, 오싹였다.
귀신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아, 알겠다. 그러니… 이만 놓거라.”
“…예, 스승님.”
내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뿌리치니, 그녀는 마지못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난 표정으로 놓아주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말이냐, 하룻밤 정도는 쉬고 가도 되거늘.”
“의지를 다졌으면 속히 이행하는 게 마음이 놓이는지라,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리 말하는 에나버니는 아름다웠다.
온몸이 피칠갑이 된 채 등에는 자기 몸 만한 크기의 대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내가 머리 한 켠으로 그리 생각할 때 즈음, 문가에 서서 나가려던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나흘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나흘이라,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길인데 너무 이르게 들리는게 아닐까 싶구나.”
“염려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왕을 토벌한 뒤에 올 예정이니까요.”
“?”
그러니까,
네 말은,
나흘 만한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온다고?
여기서 말 타고 밤낮을 안 쉬고 내달려도 편도로만 이 년 가량이 걸리는게 마왕성인데?
그 사이사이에 마왕군이 득실거리는데?
‘얘가 마지막이랍시고 농담이라도 하나보네.’
“그래, 알겠다. 그러면 나는 따뜻한 차 한 잔 달여놓고 기다리고 있으마.”
“예, 스승님, 부디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그리고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바라본 나는 산비탈 사이로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본 뒤 나도 떠날 준비를 했다.
미안하다 제자야.
아무리 내가 네 스승이라지만 그래도 나도 살아야하지 않겠냐.
그래도 앞으로의 네 삶은 주인공으로서 파란만장할지언정 그 끝에는 꽃길이 펼쳐져 있을거란다.
비록 중간에 마왕의 아버지에 사촌에 이종 팔촌 까지 다 튀어나오고
고대에 봉인 됐다던 대마왕이 부활했을 땐 제국 동부 지하에 파묻혀있던 초고대문명 결전병기를 타고 슈퍼 로봇 대전을 치루고
그러다가 우주까서 성간문명 제국과 전쟁을 치루기도 하지만
아무튼 너와 내 삶에 꽃길이 펼쳐져 있기를 바라며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자!
태고로부터 이어져왔던 용사와 마왕의 혈투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역사에 남겨지지 않은 것이 없다지만, 이번 대의 혈투는 개중 특별하다 불릴 만큼 유별났다.
그도 그럴 것이 대신전에서 용사가 신께 성검을 하사받은지 이틀 째에 마왕의 목을 베어넘겼기 때문이다.
성검을 받은 용사는 자신을 축하해주는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신전의 천장을 꿰뚫고 마왕성으로 향했다.
다른 파티원들과 만난 이후로도 그 폭발적인 돌진은 계속되었고, 마왕군의 세력권에 접어들었을 때는 오직 앞을 향해 내달렸다.
괴물들이 가로막으면 무자비하게 참살하며 내달렸다.
함정이 그들을 덮치면 무식하게 짓밟으며 내달렸다.
간혹 강이나 산맥이 앞을 가로막을 때면 지형지물을 뒤바꾸며 내달렸다.
그리, 전례 없다고 밖에 칭할 수 없던 여정에 마왕군은 대응은 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했으니,
마왕군의 수뇌부가 용사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 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왕성의 성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날 때였다.
그렇게 마왕은 죽었으며, 마왕군 또한 궤멸했다.
마왕성을 반파내며 마왕을 무참히 살해한 용사 파티는 이어서 마왕군의 수뇌부를 습격했다.
본디 용사 파티란 마왕과 마왕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이는 당연했지만 어딘가 괴이했다.
성스러운 책무나 의무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오로지 맹목적인 집념과 살의, 그리고 복수심만이 느껴졌다.
마치 더 자라날 것도 없게끔 뿌리마저 뽑아내려는 그들은 귀향길에 들어설 때에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게 무엇이든지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나아갔다.
그리 나흘 째가 되었다.
용사는 자신이 약속했던대로 스승님의 거처로 돌아왔다.
“스승님.”
산 아랫목에서부터 환희에 찬 미소로 내달려온 그녀는 제 스승의 오두막을 보며 제 심장이 터질듯 뛰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
하지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의 심장이 멎었다.
뒤엎어진 탁자, 다리가 부러져나간 의자, 신발자국이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듯 묻어난 침대,
그 사이사이마다 스며들어있는 핏자국들.
“…반드시,”
그녀는 망가진 기계 처럼 중얼거렸다.
으득 하며 악물린 이빨 사이로 핏물이 억눌린 비명 대신 흘러내렸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살의가 그녀의 두 눈에 뚜렷하게 드러났다.